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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 화성(20180325)을 즐기다.
    국내여행/국내여행 2018. 3. 26. 21:28

    수원에 왔습니다.

    수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어디일까요....

    세계유네스코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곳...

    화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곳을 오늘은 걷기로 합니다.

    물론 전체는 아니고 일부만.... 사실 여기는 수도 없이 걸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아직 화성의 행궁은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행궁도 목적에 두었지만 결국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늦어서.... 5:30까지만 개방하더군요....

    해도 길어졌는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합니다.


    수원 화성(水原 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52킬로미터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10월 10일(음력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1]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팔달문[편집]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흥인지문, 전주성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2호로 지정되었다.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 (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 (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공심돈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성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거의 축조 당시의 완형(完形)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치의 높이는 15척(4.25m)이며 서북 2면에 각각 현안(懸眼) 두 개를 내었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고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벽축의 높이는 18척(5.58m)이고, 아래의 네모난 넓이는 23척(7.13m) 위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 21척(6.51m)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을,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10호로 지정되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17척 5촌(5.42m), 바깥 원 둘레 122척(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1.24m), 안쪽 원 둘레 71척(22m),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1.39m)의 공간을 비워두고,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였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아래층 공심에서 나선형의 벽돌 계단으로 윗층의 집을 이르기 때문에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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