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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동도(2019112)를 즐기다.
    국내여행/국내여행 2019. 12. 15. 17:02

    강화에 여러번 갔었다.

    사실 교동도도 가봤지만 그닥 관광지로 변모하기 전이라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한번 교동도를 가기로 했다.


    교동도에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기전에 출입증을 받고...

    다리를 건너 조금을 가니 교동의 번화가인 대룡시장이 나왔다.


    시장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는데 예전에 비해 상당히 활기차 보였다.


    교동도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발췌)


    인구는 광복 당시 8,644명이었던 것이 6·25전쟁 뒤 많은 피난민으로 1965년에는 1만2443명에 달해 최고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1977년부터 감소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2009년 5월 현재 교동면 인구는 3,132명이고 세대수는 1,389호이다.

    2006년 현재 교동면 전체 면적은 47.14㎢이고 논 25.89㎢, 밭 2.57㎡, 임야 11.45㎢이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교동토의 간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저평한 평야가 넓고, 완비된 경지정리·수리시설 기계화 등으로 쌀의 생산량은 섬의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방으로 나가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대추·버섯 등이 생산된다.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농가의 부업으로, 완초공예품은 강화도의 화문석처럼 그 이름이 높다. 완초공예품으로는 화방석·꽃삼합·광주리·손가방·화문석 등 다양하며, 그 가운데 화방석과 꽃삼합은 대도시로 팔려나가는데, 수익성이 높아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6·25전쟁 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있어 육지와 서해도서가 자유롭게 연락되었으나, 전쟁 이후 매우 불편해졌다. 그러나 서울과의 연결은 강화도 창후리에서 수시로 배가 있었고, 연안도서를 연락하는 선편이 있었으나 불편한 편이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강화도와 연결되었고,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邑城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喬桐舊縣墟)를 비롯하여, 고려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慶源殿)과 철종잠저소(哲宗潛邸所)·봉수대(烽燧臺)·단묘(壇廟) 등과 그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또,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교동향교 등은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이름있다


    형성 및 변천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이라 불려 혈구현(穴口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교동이라 일컬었으며, 고려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으며, 그 뒤 이를 고쳐 현감이라 일컬었다. 1629년(인조 7)화량진(花梁鎭)으로부터 수영(水營)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의 주사(舟師)를 통괄하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이르러 교동부사를 격을 낮추어 현감으로 하였다가, 1779년에 통어사가 강화로 이속되면서 교동현감은 다시 부사 겸 방어사로 승격되었다. 1789년에 통어영(統禦營)이 다시 교동으로 옮겨왔다.

    1866년(고종 3) 통어사가 다시 강화로 이속되면서 부사 겸 방어사로 하였다가, 같은 해 8월 또다시 통어사를 두었다. 1884년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어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내려갔다.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시장거리를 구경하고 이제 교동읍성으로 향한다.

    그 옛날 교동현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무너진 산성을 복원한 일부만 존재하는 곳...

    뭐 그냥 흔적이라고나 할까....










    과거의 큰 마을을 이루었을 교동읍을 보고 이제 다시 바다를 향해 간다.

    바다...!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아닐까...

    교동도의 남산포구.. 과거에 수군들의 어영지가 있던.. 이곳에서 사신당등을 보고 포구를 한바퀴 둘러본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바다에서 석양을 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에 노을을 내리는 바다는 너무도 예뻤다.

    이제 다시 날이 따듯해지면 낚시를 한번 하러 와야 할것 같다.


    아름다운 교동도를 다시한번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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