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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이종일 선생 생가를 찾다(20171009)국내여행/국내여행 2017. 12. 16. 22:10
태안에 유명한 인사가 뭐 있나 해더니 이종일선생이란 분이 있습니다.
일제때 한창 나이에 구국의 뜻과 교육에 뜻을 가지고 일신의 모든것을 포기한 삶을 살았네요...
처음 들어본 선생의 조함이지만...
참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보탬이 되었던 훌륭한 분의 생가를 찾아 보았습니다.
참 독립선언 33인의 한분입니다.
초기 활동[편집]
이교환(李敎煥)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청남도 태안 태안군 원북면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여 1873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개화파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2년 8월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사절단 일원으로 수행하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 문물을 직접 보고 온 것 또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주시경 등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필진의 한 사람이 되었다. 1896년 11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연사로 활동하였다. 1898년 3월 개화운동 단체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898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10개월만에 사퇴하였다. 1899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폐쇄당하자 언론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이승만 등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필진으로 활동했으며, 《대한황성신문》 사장을 맡아 언론계에서 활동했고,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에 참가하고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등 개화 사상에 기반한 계몽 운동에 활발히 나섰다.
1898년 7월 25일 황제 고종의 탄신일 경축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歳)가 성수망세(聖壽亡歳)로 오기되었다가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타인의 조작으로 판명되어 곧 풀려났다.
독립 운동[편집]
1906년 손병희를 통해 천도교에 입교한 뒤, 윤치호, 윤효정 등과 함께 자강회에도 참여하였고, 1907년(융희 1년) 11월에는 대한협회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천도교 월보사 부장으로 활동하며 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천도교 월보과장(月報課長)과 보성 인쇄주식 회사(普成印制株式會社) 사장을 역임했다.
1912년 천도교의 재정과 신도 수, 전국적 조직망 등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 1894년 갑오년 동학 농민 운동, 1904년 갑진년 개화 신생활 운동에서 이름을 따 1914년 갑인년에 재현하는 삼갑운동(三甲運動)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나 실패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이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 사장을 맡고 있던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거사 열흘 전부터 비밀리에 인쇄한 것이다. 당시 보성사는 최신식 인쇄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종일은 이곳에서 천도교의 월보(月報)를 펴내고 있었다.
이종일은 거사의 핵심중 하나인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데다 최남선과 함께 이승훈을 통한 기독교 대표들과의 연결 고리를 주선하였다. 3.1 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사비를 들여, 기미독립선언문 유인물 3만 5천 부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이에 따라 공판에서 민족대표 중에서도 주범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생애 후반[편집]
출옥하자마자 1922년 3월 1일 또다시 천도교 교인 등을 중심으로 3.1 만세 운동 3주년이 되는 날을 기해 천도교 신자들, 보성사 직원 50여명과 함께 거리로 나가 제2의 3.1 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계획하고 그때 낭독할 제2의 독립선언문인 자주독립선언문 초고를 2월 20일에 직접 작성, 김홍규에게 인쇄토록 하였다가 태안경찰서 직원의 감시망에 걸려 사전에 탄로나고, 인쇄물은 모두 압수당하였다. 이후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글맞춤법을 연구한 한글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다른 독립 만세 시위를 기획하고 저서 《한국독립비사》를 쓰다가 압수당하였다. 그밖의 저서로는 1919년 ~ 1922년에 메모 비슷하게 기록한 《옥파 비망록》을 남겼다.
집안이 가난하였던 그는 삼순 구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중 1925년 8월 31일 경성부 죽첨정 정목 31번지 자택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사후[편집]
- 서울 미근동 공립보통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아현리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36년 5월 17일 손녀 이장옥, 친척 이종린 등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생가 터가 복원되어 있고,[1] 태안의 충애사(忠愛祠)에 영정이 안치되었다.[2]
- 그가 쓴 제2의 독립선언문은 구전으로만 전하다가 1979년 2월 27일 묵암기념사업회(회장 이병도) 소속 이현희 교수가 묵암비망록에서 발굴해냈다.[3]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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