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20241225)를 즐기다.
모악산을 내려와 금산사를 들러봅니다.
그리고 금산사에 새로이 알게 된 날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리고 멋진 곳....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는 금산사를 먹지게 즐긴 하루입니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金堤 金山寺 慧德王師塔碑) 보물 제24호
금산사 안에 서있는 탑비로, 혜덕왕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 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에는 혜덕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글씨는 구양순법(歐陽詢法)의 해서체로 썼는데,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것은 예종 6년(1111)으로 혜덕이 입적한 지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金堤 金山寺 幢竿支柱 보물 제 28호
‘깃발’을 ‘당’, ‘깃발을 매는 긴 장대를 ’ 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 당간‘을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이 ’ 지주‘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대형 불화를 설치하는 법회나 신성한 영역을 나타내는 깃발을 걸 때 주로 사용한다. 금산사의 보존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8세기 후반 경에 제작되었다. 양쪽에 놓인 지주가 동서로 마주 보고 있고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하는 데 필요한 구멍이 3개 뚫려 있다. 바깥쪽의 각 면과 받침돌에서는 화려한 조각 기법을 엿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당간 지주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김제 금산사 석련대 金堤 金山寺 石蓮臺 보물 제23호
김제 금산사 석련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연꽃 모양의 받침대이다. 본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시대의 화려한 양식을 띄고 있어서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 사이에 제작된 좌대로 추정된다. 마치 여러 개의 돌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상, 중, 하의 3단으로 하대석은 10 각형으로 면마다 세밀한 안상을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6각으로 하대석처럼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문양을 새겨놓았다. 상대석에는 연꽃잎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으며, 윗면 중앙의 네모난 구멍 두 곳에 석조불상을 세웠던 연화좌대로 추정된다. 그 규모나 조형미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김제 금산사 금강 계단 金是 金山寺 金剛 戒壇 보물 제26호
김제 금산사 금강 계단은 통일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진표율사가 최초로 설치하였고, 고려 혜덕 왕사 소현이 고쳐 다시 지었다. 단 가운데에 종 모양의 탑이 있고, 그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사의 수계*의식이 행해졌으며, 미륵 십선계**를 주었다. 미륵전은 미륵하생 신앙, 금강계단은 미륵상생 신앙을 상징하는 도솔천을 표현하였다. 기단의 각 면에는 고려 시대의 수려한 기법이 잘 표현되어 있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리탑 형식의 계단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희귀하고 중요한 성보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수계(受戒):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을 받는 의식. **십선계(十善戒): 불교에서 세속인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 ***신장상(神將像): 불교를 지키는 신 가운데 무력으로 불법을 옹호하는 신장의 조각상
김제 금산사 오 층 석탑 金堤 金山寺 五層石塔 보물 제25호
김제 금산사 오 층 석탑은 고려 경종 4년(979)부터 성종 원년(982)에 걸쳐 세워졌다. 본래는 9층이었으나, 현재는 5층 석탑으로 남아있다. 당시 윗 기단 사리공*에 석탑의 정광여래 사리 2과, 석가여래 진신**사리 5과, 청동 불상 등을 모셨으나, 이후 정광여래 사리는 분실하여 총 3과가 되었고, 사리를 제외한 유물들은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2018년 음력 4월 24일 보수정비 준공식 때 사리 내함은 금, 중함은 은, 외함은 방자유기로 제작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탑의 맨 위층 네모난 지붕 모양의 노반**이 크고 넓으며, 석탑의 상륜부는 대장전 용마루 한가운데도 설치되었다. 대장전은 본래 경전을 모신 ‘짜이띠야’인데, 경전이 소실되자 불상을 안치하였고, 오층 석탑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스투파’****이다. *사리공(舍利孔): 탑에서 사리 등을 모시는 공간을 이르는 말 **진신(眞身): 진리의 몸이라는 뜻으로 깨달음을 구하여 중생을 교화하려는 사람을 이르는 말 ***노반(露盤): 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 ****스투파: 산스크리트어로 부처나 고승의 사리, 유품 등을 안치하는 곳을 이르는 말
김제 금산사 미륵전 金堤 金山寺 彌勒殿 국보 제62호
김제 금산사 미륵전은 진표 율사*가 통일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거대한 미륵불을 만든 후 혜공왕 2년(766)에 연못을 참숯으로 메우고 세운 것이다.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3개월 동안 감금 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방화에 의해 전소되었으나 조선 인조 13년(1635)에 수문 대사가 복원하였다. 외부에는 미륵전, 용화지회, 대자보전의 현판이 각층에 부착되어 있고, 전형적인 3층 목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내부는 통층으로 미래불인 미륵부처님, 좌측에는 법화림 보살, 우측에는 대묘상 보살의 미륵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최대는 청동 연화대로써 많은 세월이 흘러 연꽃 문형이 탈락하여 솥 형태로 변형되었다. 손으로 최대를 만지고, 업장**소멸과 소원 성취를 지극정성으로 발원하면, 미륵부처님께서 가피***를 내려주신다는 영험담이 전해 내려온다. *율사(律師): 계율에 정통한 고승을 의미하며, 그릇된 일을 감찰하여 지도하는 스님을 지칭하기도 함 **업장(業障) : 악한 행위로 생기는 모든 장애를 말함 ***가피(加被) :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줌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 석탑 金堤 金山寺 六角 多層 石塔 보물 제27호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 석탑은 통일 신라시대 일반적 도양에서 장식이 화려한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세워졌다. 본래 봉천원 터에 있었으나, 정유재란 이후 수문 대사가 전각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대다수의 탑은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조성되지만, 벼루를 만드는 점판암으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옥개석은 기단부의 연화대 위에 겹겹이 쌓았고, 추녀, 밑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상하에는 탑신을 끼우는 홈이 새겨져 있는 데, 하나의 부재로 탑신을 올리지 않고, 각 면을 한 개 한 개의 판석으로 맞춰 끼웠던 흔적이 보인다. 각 층마다 체감 비례가 적절하고, 몸돌과 지붕돌 각 면의 조각이 섬세하며, 뛰어난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김제 금산사 노주 金堤 金山寺 露柱 보물 제22호
김제 금산사 노주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돌로 조성한 좌대 위에 보주* 형태의 돌기둥이 놓여 있어 명칭을 노 주라고 하였다. 미륵전 앞에서 미륵부처님을 광명으로 공양했던 광명대 역할을 하였으나, 1922년 대장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할 당시 같이 옮겨 놓았다고 한다 조각이나 양식을 고려해 보면 고려 전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몸체가 없이 바닥돌, 받침돌, 상륜부로 구성되었으며, 아래 받침돌과 상부 받침돌은 연꽃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불상을 올려놓는 좌대로 추정된다. *보주(寶珠) : 탑이나 석등의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
김제 금산사 대장전 金堤 金山寺 大藏殿 보물 제827호
김제 금산사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관하려고 만든 목탑 양식의 전각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불에 타 없어졌으나 인조 13년(1635)에 미륵전 앞에 다시 세워졌고, 1922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지붕 위에는 금강 계단과 오 층 석탑에서 볼 수 있는 복발*과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본래 금산사에서 간행된 불교 경전 등을 건물 내부에 보물처럼 보관하였지만, 경전 등이 유실되자 석가 삼존상을 봉안하였다. 외부 벽면에는 ‘오달국 사인 명창’, ‘저지 화상 도담’ 등 10폭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복발(覆鉢) : 탑이 노반 (꼭대기 층의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 위에 주발을 엎어 높은 것처럼 만든 장식 **보주(寶珠) : 탑이나 석등이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
김제 금산사 석등 金堤 金山寺 石燈 보물 제828호
석등은 부처님과 조사 스님께 등불을 공양하기 위해 금당이나 부도전 앞에 세워진다. 김제 금산사 석등은 조각이나 지붕돌에 새겨진 꽃 조각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전기의 양식으로 추정된다. 원래 미륵전 앞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1922년에 대장전을 이전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 받침돌, 중간 기둥, 위 받침돌로 3단을 쌓고,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어 놓았다.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받침돌부터 머리 부분까지 온전히 남아 있다.
모악산을 뒤에 배경으로 하고 있는 미륵전...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오늘 이곳 금산사를 보며 너무도 많은 보물들과 만나 행복합니다.
이른 문화유산이 가득한 이곳...
다시 한번 찾을 곳입니다.
미륵전과 모악산 너무도 어울리는 그림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본 성문....
다시 한번 행복을 느끼게 해 준 하루의 마무리입니다.
금산사金山寺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163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492년에 써진 〈금산사 5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한 것이라 하여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大宗師)인 혜덕(慧德) 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法席)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석연대(石蓮臺)·5층석탑·노주 등이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선조 34)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 완공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彌勒殿)·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금강문·미륵전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다시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조형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석조유물은 노주(보물 제22호)·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石鐘 : 보물 제26호)·6각 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또한 미륵전(국보 제62호)·대적광전이 있었고, 그밖에 대장전·명부전(冥府殿)·나한전·일주문·금강문·보제루(普濟樓)·종각·중 향각·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受戒) 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자리 잡고 있다.
출처 : 나무위키/국가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