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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20210904)를 즐기다

귀한돌 2021. 9. 8. 12:58

오랜만에 화진포에 왔습니다.

화진포!

많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별장을 짓고 쉬었던 곳...

지금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기억에 없던 입장료를 받는군요..

3,000원 아무것도 아니지만...

일단 입장료를 지불하고 주차를 합니다.

 

그리고 이기붕별장으로...

 

이기붕(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만송(晩松). 서울 출생. 효령대군(孝寧大君) 보(示甫)의 17대손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 회정(會正)의 손자 낙의(洛儀)이다. 부인 박(朴)마리아와의 사이에 강석(康石)·강욱(康旭) 두 아들을 두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 서울특별시 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였다. 4·19혁명 이후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5년서울의 보성학교(普成學校)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중퇴, 선교사 무스(Moose, J. R.)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이오와주의 패사디나시에서 고학으로 1923년 주립대학인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신보』(三一申報) 발간에 참여하다가 1934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허정과 충북 영동의 광산에 투자하여 광산 사업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에 들어가 군정재판장의 통역을 역임하고,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대한기독청년회·대한적십자사 등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사회적 발판을 다졌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서 정치적 기반이 굳혔다.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4월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신성모(申性模)국방부장관 시절에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을 수습했다. 같은 해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여 세칭 발췌개헌안 통과에 일역을 담당하였다.

1952년 대한체육회장이 되었고, 1953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진출하였으며, 한미재단 한국사무소장직도 역임하였다. 1953년에는 이승만의 자유당 내 족청계 제거 지시에 따라 자유당 총무부장을 맡아 박용만 조직부장 등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같은 해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1954년 3월에 개최된 제5차 자유당전당대회에서 자기 중심의 당편제(黨編制)를 완료, 5·20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소속을 포섭하여 재적 3분의 2를 넘는 137석을 확보하였다. 같은 해 제2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자유당의 헌법개정선 확보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의 길을 트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하였다가 개헌선에서 1명이 미달되어 일단 부결되었으나, 바로 다음날에 사사오입을 통해 이를 번복, 가결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인하공과대학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6년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고, 그 해 제3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경기도 이천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의장이 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제5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혁명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자유당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붕괴되고,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관사 36호실에 피신하여 있다가 4월 28일 맏아들 강석의 총격으로 집단자살하였다. 그가 살던 서대문의 집은 4·19혁명학생도서관이 되었다.

 

 

한참을 더운 햇빛을 피해 소나무 숲속 그늘에 앉아 놀다가 이동합니다.

소나무의 수령이나 크기가...

여기서 응봉을 가자고 하니...

단호하게 노를 외치는 우리 내자...

포기하기로...

 

 

화진포의 성이라고 불리우는 김일성별장...

이곳은 많이 단장을 했다.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고...

코로나로 인해 등록도 해야 하고...

옥상에서 바라보는 화진포의 풍경...

아름답고 시원하고...

좋은 시간이다.

 

김일성 별장(화진포의 성)

김일성은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휴양지로 화진포를 찾았다. 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입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김일성 별장은 당초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1938년 독일망명 건축가 베버가 건축하였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지어져 당시 건축물로는 제법 화려함이 엿보인다.

김일성 별장에는 옛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를 비롯해 김일성 가족이 사용했던 응접 세트 등 각종 유품이 모형물로 만들어져 전시 되었다. 해안가 산기슭에 위치한 김일성 별장은 광복 직후 건립, 한국전쟁 이전까지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와 함께 수시로 이용했던 곳으로 본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물이었으나 전쟁 중 크게 훼손되어 64년 육군이 본래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1층 건물로 재건축 했었다.

김일성 별장의 절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마주 보이는 금구도라 불리는 바위섬으로 화진포 해변에서 3백여m 떨어진 금구도는 거북 모양을 닮은데다 가을철이면 이 섬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이 노랗게 변해 섬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김일성 별장이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해안 언덕에 위치한 것과 달리 이승만 별장은 바다는 보이지 않고 화진포 호수만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서로 1km 정도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바닷가에 들러 장노출로 장난을 하는데..

필터가 없으니 그냥...

장난했다..